물 한 모금 간절했던 다른 아이들도, 서란이 나서자 아무 말 없이 물러났다.
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채은아… 나 한 모금만 줄 수 있을까? 나 열이 너무 심해서… 너무 아파…”
평소에는 작은 투명인간처럼 지냈지만, 지금만큼은 물이 간절했다.
순식간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고, 표정은 하나같이 불쾌했다.
정채은이 대답할 틈도 없이, 한서란이 물병을 낚아채 들이켰다. 그리고는 나를 향해 소리쳤다.
“박선영, 네가 나랑 물을 두고 싸우겠다고? 너 그 꼴로 물 마셔서 뭐 하게? 너한테 주는 건 그냥 낭비야!”
예전에는 그래도 체면이라도 차렸던 애였다. 직접 손대는 일은 잘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이 교실은 그녀의 왕국이었다.
“한서란, 그만해. 시끄럽게 굴면 좀비들 온다.”
한 남학생이 조용히 말했다. 앞머리가 살짝 내려오고, 손목에는 여전히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도 말끔하고 단정했다.
나는 그를 보며 눈물이 핑 돌았다. 김은성.
고2 때 내 짝이었고, 우리는 가까웠다. 같은 대학에 가자는 약속도 했었다.
그러다 내가 괴롭힘을 당하게 됐고, 그 서란이 그의 여자친구가 되었다.
“왜 내 남자친구를 그렇게 봐? 걔가 너 두 편 들어준다고 해서 아직도 미련 있어? 착각하지 마. 그냥 좀비 올까 봐 조용하라는 거야.”
한서란은 비웃으며 내 쪽으로 걸어왔다.
김은성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한서란은 내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너 예전에 김은성 꼬시려고 편지까지 썼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아? 지금 세상이 이 지경이 됐는데도, 너 아직도 그럴 정신 있어?”
나는 그를 꼬시려던 게 아니었다. 그저 그에게 한서란의 본모습을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그 편지를 읽지도 않고 버렸다.
머리카락이 뜯길 것 같았다. 온몸에 힘이 빠졌다. 나는 겨우 목소리를 짜냈다.
“미안해… 제발… 나 심장… 아파… 살려줘…”
선천성 심장병을 앓고 있는 내게, 그녀는 너무 강했다. 저항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밀쳐내며, 다른 아이들을 둘러보더니 갑자기 제안했다.
“박선영, 밖에 나가보게 하자. 혹시 구조대를 만나면 좋은 거고, 못 만나면 먹을 거라도 좀 가져오겠지. 학교 매점, 그렇게 멀지 않잖아?”